“나는 힘 있는 촌장(村長)이었다”며 외할머니에게도 대드는 레바논 소년
前生을 기억한다는 아이들(17) - “행복했던 내 전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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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레이만 안다리는 1954년 3월 4일 레바논 팔루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드루즈파 교인(敎人)이었다. 이 종파는 이슬람 시아파에서 많이 변형됐는데 사실상 거의 다른 종교로 여겨진다고 한다. 환생은 드루즈파의 핵심 교리 중 하나다.


술레이만은 어렸을 때부터 전생에 대한 부분적인 기억을 떠올려냈다. 전생에 대한 기억들은 꿈을 통해 그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이 있었다고 하며 몇 명의 이름을 대기도 했다. 가리프라는 지역에서 살았다고 했으며 집에 기름을 짜내는 착유기(搾油機)가 있었다고 했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는 다른 아이들의 사례와 술레이만 사례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술레이만이 전생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려내게 된 것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더 들었을 때였다고 했다.

 

술레이만은 11세쯤 됐을 무렵 특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친가 쪽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는데 외할머니가 드루즈파의 종교 관련 서적을 빌리러 집에 왔었다. 술레이만은 다짜고짜 빌려줄 수 없다고 하며 집에 이런 책도 없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아이를 불러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꾸짖었다. 술레이만은 갑자기 자신이 전생에 종교 관련 서적이 있었는데 이 책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었다고 말했다. 드루즈파 교인들은 종교 서적을 매우 귀하고 성스럽게 다루고 이를 집에 잘 보관해놓는다고 한다. 술레이만의 행동은 그를 어린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매우 무례한 일이었지만 성인이 된 드루즈파 교인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술레이만은 자신이 가리프라는 지역에 살던 촌장(村長)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은 압달라 아부 함단이었다며 당시 생의 다른 기억들을 말하곤 했다. 서너 살 때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과 달리 10대가 돼 전생을 기억하게 된 술레이만은 자신이 촌장이었다고 말하면 조롱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무시를 받을 것 같았던 술레이만은 약 2년간 기억을 혼자서만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술레이만의 가족은 가리프로 찾아가 아이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검증해보기로 했다. 가리프는 이들이 살던 팔루가에서 약 30km 떨어져 있었다. 길은 연결돼 있었지만 레바논 내에서도 지역이 다른 지역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 사유가 필요했다고 한다. 술레이만의 가족 중 가리프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가 혼자 가리프로 가 술레이만이 하는 이야기를 검증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에 따르면 아시아의 경우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아이가 나타나면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빨리 퍼진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던 술레이만의 친척 중 한 명이 가리프에서 왔다는 사람들을 만나 술레이만의 이야기를 해줬다. 가리프에서 살았다던 이 사람들은 술레이만의 이야기가 그가 말한 압달라 아부 함단의 삶과 일치한다고 했다. 착유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숨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촌장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압달라는 1942년 65세쯤 됐을 때 숨진 것 같다고도 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해준 가리프 주민들은 술레이만을 가리프로 초청했다. 술레이만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967년 늦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하게 됐다고 한다.


가리프를 찾은 술레이만은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압달라 아부 함단의 미망인과 두 자녀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으나 이들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사진 속에 있는 다른 가족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술레이만은 그러나 가족이 아닌 다른 알고 지내던 사람 세 명을 알아봤고 가리프의 몇몇 장소들을 떠올려냈다. 그가 떠올린 곳 중 하나는 압달라가 살던 집으로 향하던 오래된 길이었다. 이 길은 1967년이 됐을 무렵엔 사실상 폐쇄된, 즉 사라진 길이었다고 한다.


이언 스티븐슨 박사는 술레이만의 사례의 특징은 그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과거의 기억과 그의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술레이만은 가리프에 처음 가기 전까지 전생에 대한 총 17가지의 기억을 떠올려냈다고 한다. 압달라의 자녀 이름 대부분, 그리고 다른 사소한 이야기들을 떠올려냈다. 17가지 중 두 개만 빼고는 모두 일치했다고 한다. 이 중 틀린 내용은, 압달라의 아들 한 명의 이름이 사림이라고 했는데 사림은 압달라의 남자형제 이름이었다. 그는 사림이 장님이었다고 했는데 그가 아니라 압달라의 아들 나시브가 장님이었다고 한다.


스티븐슨 박사는 1968년 3월부터 이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1972년까지 이를 다뤘다고 했다. 팔루가와 가리프에 거주하는 19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스티븐슨 박사에 따르면 술레이만은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행동했다. 동년배 아이들과 있는 것보다 어른들과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른들과 동석하는 자리에서도 항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나무라는 것 역시 싫어했는데, 누군가가 나무랄 때면,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나를 나무라서는 안 돼”라고 하더란 것이다.


술레이만은 다른 가족에 비해 종교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이는 압달라 아부 함단의 말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압달라는 당시 지도자로 추앙받았고 남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도덕심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고 한다.


술레이만은 처음 가리프에 초대됐을 때 이를 거절했었는데 이는 압달라의 말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도 보였다. 압달라는 우선 말년에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압달라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이중 몇 명은 선천적 장애를 갖고 있었고 한 명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또 한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 압달라와 좋지 않은 관계였다.


압달라가 말년을 어렵게 보내게 된 원인 중 또 하나는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촌장 명의의 거짓 문서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게 당국에 적발됐고 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또 착유기 사업을 너무 키웠다고 한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생각했던 것보다 사업비용이 커져갔고 빚더미에 앉을 걱정을 하다 결국 병에 걸렸다. 스티븐슨 박사는 이런 사례를 종합하면 술레이만이 왜 곧장 가리프를 방문하려 하지 않았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고 했다.


압달라는 술레이만이 태어나기 12년 전인 1942년에 숨졌다. 스티븐슨 박사는 이 공백 기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술레이만에게 직접 물어봤다고 한다. 술레이만은 중간에 또 하나의 짧은 삶을 살았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스티븐슨 박사는 드루즈파의 경우 이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공백이 하루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들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공백 기간에 겪은 삶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스티븐슨 박사는 술레이만이 떠올린 압달라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입받은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두 마을의 거리는 30km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일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중 고팔이라는 아이는 자신이 남자형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고 한 사례가 있었다. 스티븐슨 박사는 이 사례는 그나마 지역 언론에 대략적으로라도 소개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용을 지어냈을 수는 있지만 압달라의 삶은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로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티븐슨 박사는 1997년 11월 팔루가를 찾아가 술레이만을 만났다. 당시 술레이만의 나이는 43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숨졌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대장장이, 기계공, 운전사 등으로 근무했다. 1997년 당시에는 무직(無職) 상태였다고 한다.


이 무렵 술레이만은 전생의 기억이 과거처럼 지속적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문득문득 떠오르게 된다고 했다. 술레이만은 1988년 가리프에서 열린 한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했다. 그때 그는 과거에 가보지 못했던 집 한 채를 발견하고는 “보수공사가 됐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집은 실제로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리프는 이때 이후 가리프를 다시 방문한 적은 없다고 했다.


술레이만은 전생이 행복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두 개의 가족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며 “과거는 과거에 묻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스티븐슨 박사는 술레이만이 과거 압달라가 권력과 부(富)를 갖고 있던 날들을 두고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무의식중에 힘들었던 말년의 삶은 잊으려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술레이만은 이후로도 계속 ‘촌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정치에 관심을 보였고 스티븐슨 박사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지인들의 권유로 팔루가 지역에서 정치를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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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0, 01: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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